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무 덴노 (문단 편집) === 새로운 궁궐과 수도 === 진신의 난이 끝난 뒤에도 덴무 천황은 한동안 미노에 머물렀다. 9월이 되어 천황은 오카모토궁(아스카오카모토궁)에 들어갔고 이 해에 새롭게 궁실을 지어 거기로 옮겨 살았다. 이때 덴무 천황이 새로 지은 궁은 그가 죽기 두 달 전인 슈초 원년([[685년]]) 7월 20일에 '아스카기요미하라궁'으로 명명되었다. 현재 일본의 고고학 발굴조사 결과 아스카궁(아스카이타부키궁) III-B기에 해당하는 건물 유적군이 이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이메이 천황때의 아스카오카모토궁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에비노코곽(郭)을 추가한 것이 주요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고고학의 설명이다. 에비노코곽에는 큰 건물터가 하나 있고 당시에는 이곳이 대극전으로 쓰였다. 아스카기요미하라노미야 주변에는 미야코(京, 경)로도 불리는 도시적인 확대가 있었지만, 후대의 후지와라쿄(藤原京)나 헤이조쿄(平城京), [[헤이안쿄]](平安京)와 같은 동서남북으로 구획된 바둑판같은 길이 정연하게 직교하고 있는 형태의 도시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궁궐의 북북동에는 아스카노이케 유적이라 불리는 국가 공방이 있었고 궁과 관청에서 쓰는 여러 가지 물건, 그리고 부본전 등의 화폐도 이곳에서 주조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덴무 덴노는 이 궁에 만족하지 않았는데, 국가의 '대변혁'에 걸맞은 새로운 궁궐, 영원히 이어질 수도를 건설할 포부를 세우고서 걸맞은 땅을 찾았다. 그렇게 찾아낸 것이 신성(新城), 훗날 '후지와라쿄'라 불리게 될 새로운 수도였고, 그 공사가 덴무 5년([[676년]]) 시작되었다. 《만요슈》에 이 공사를 읊은 노래가 두 수 실려 있는데,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도로마다 도랑을 파며, 이 때까지 방위로 규제되어 있지 않던 기존의 도로와 건물들을 철거하고 남북으로 뻗은 대로를 주축으로 하는 바둑판 모양의 수도를 조영했지만, 천도는 하지 못했다. 덴무 11년([[682년]]) 3월 1일, 천황은 미노노 오오키미 등에게 명령해 지형을 답사하게 하고, 16일에는 그 자신도 직접 이곳을 찾았다. 이듬해 12년([[683년]]) 7월 18일에 미야코를 세울 땅을 둘러본 뒤, 13년([[684년]]) 3월 9일에 궁실을 지을 부지를 정했다.(수정된 도시계획으로 공사가 재개된 것도 그때였다.) 이 새로운 수도의 건설은 천황의 죽음으로 중단되었지만, 천황의 능은 새로운 수도의 중심축이 되는 선을 남쪽으로 연장한 바로 앞에 쓰였다. 덴무 천황 사후 즉위한 지토 천황에 의해 새로운 수도의 건설은 다시 재개되어 마침내 완성되었고, 이곳은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도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천황은 모름지기 수도란 2, 3개는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서(부도제) 새로운 수도의 건설계획이 한창 진행되던 12년([[683년]]) 12월 17일에 나니와쿄(難波京)를 부수도로 설치했는데, 이곳의 건물은 선대 [[코토쿠 덴노]]가 지은 나니와노미야(難波宮)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이듬해 2월 28일에는 시나노에도 부수도를 만들 부지를 살펴보기 위한 목적으로 추측되는 사신을 파견했지만, 이것은 일단 실행에는 옮겨지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